담장에 걸터앉아 방 안쪽을 보니 거대한 냉장고가 흐릿한 은색으로 빛났다. 냉장고에 든 두부를 오늘 중으로 먹어야 하다는 것을 다로는 기억해 냈다.
시바사키 도모카(柴崎友香) 장편소설. 제 151회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
재개발로 철거가 예정되어 있는 연립주택 '뷰 팰리스 사에키 III'에 살고 있는 남성 다로. 그는 같은 연립에 살고 있는 '니시'라는 이름의 여성을 통해 집 근처 전원주택의 존재를 알게 된다. 밝은 물빛의 벽널, 납작한 피라미드 각뿔형의 적갈색 기와지붕, 창끝 모양의 꼭대기 장식이 돋보이는 물빛 집. '봄의 정원'이라는 사진집의 배경이 되었던 그 주택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던 니시는 계속 그곳을 관찰하고, 그녀에게 집 베란다 난간을 허락한 것을 계기로 물빛의 집은 다로의 일상 속으로도 들어오게 된다.
'봄의 정원'은 소설의 일반적인 구조를 기대한 독자를 여지없이 배신한다. 이 소설에는 개성 있는 인물과 사건은커녕, 남녀 간의 흔한 연애사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소설은 온통 풍경과 집에 대한 묘사로 채워져 있으며, 인물 사이의 대화 또한 대부분 그것에 종속되어 있다. 때문에 굳이 표현하자면 이 작품은 '체험 유도 소설(?)'에 가깝다. 인간의 오감은 기억을 소환한다. 때문에 우리는 삶의 의도치 않은 순간에 과거와 마주하게 된다. 인상적인 서사의 자리를 대치하는 이 소설 특유의 공간감은 읽는 이에게 그 오감과 같은 역할을 한다.
봄날의 정원은 재생의 공간이다. 책을 읽으면서 당신의 일상에서 밀려났던 기억들이 천천히 되살아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면, 이 소설은 그 목적을 온전히 완수한 것이다.
긴 설명이 필요 없는 소설.
#만족지수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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