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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砂の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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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ndharva 2016. 5. 14.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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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이 없으면, 도망치는 재미도 없다. 


-소설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음-


8월의 여름 날, 학교 교사인 니키 준페이는 곤충 채집을 위해 해변가의 사구(砂丘)[각주:1]를 찾는다. 색다른 곤충을 찾아 헤매던 그는 한 노인을 만나게 되고, 돌아가는 차편이 이미 끊겼으니 자신의 마을에서 하룻밤 묵어가라는 제안을 받아들인다. 노인이 안내한 곳은 부락 가장 바깥쪽 사구의 능선에 접해 있는 구멍 중 하나. 그곳에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야 볼 수 있는 낡은 판자집이었다. 젊은 여성이 혼자 기거하는 집, 온통 모래투성이에 식사를 할 때마저도 우산을 받쳐 들어야 하는 집에서 하룻밤을 묶은 준페이는 다음날 자신이 무서운 함정에 빠졌음을 깨닫게 된다.  


모래를 뒤집어쓴 집. 전기도 들어오지 않으며 물과 음식은 배급으로 유지되는 일상. 하루에 한 번씩 모래를 퍼담아 망태기로 끌어올리지 않으면 모래에 잠겨버릴 세계. 상상만으로도 기이한 느낌을 주는 이 공간에 한 남자가 납치된다. 현실과 완전히 격리된 모래의 부락이 노동력 확보를 위해 시도한 기만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언제부터 그곳에 살았는지 불확실해 보이는 여자는 모래의 삶에 완전히 동화된 듯 수동적이고 순종적이다. 남자는 탈출을 시도한다. 모래 절벽을 기어올라가 보기도 하고, 여자를 인질로 삼아 사다리를 요구해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모두 좌절되고, 절치부심 끝에 준비한 탈출의 기회마져도 함정에 걸려 처참하게 실패한다. 여지껏 탈출에 성공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여자의 말에 남자는 절망할 뿐이다. 


부락 생활에 적응하는 척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던 남자는 예상치 못한 현상을 목격한다. 모래 구덩이에서 일정량의 물이 계속 솟아오르는 장소를 발견한 것이다. 그날 이후로 남자의 일상은 변화한다. 유수 구멍에 대한 관찰과 기록은 그의 일상이 된다. 남자는 무언가 몰두할 수 있는 취미가 있어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느덧 이듬해 봄. 여자는 임신을 하게 되지만 사산의 위기에 처한다. 부락민들은 그녀를 병원으로 옮기기로 결정한다. 마침내 반 년 만에 처음으로 구덩이에 사다리가 내려오고 여자는 삼태기망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진다. 모두가 자리를 떠난 후에도 사다리는 그대로 남아있다. 천천히 사다리를 오른 남자는 바다를 바라보며 심호흡을 한껏 해보지만 입안에 모래만 들어올 뿐 상쾌하고 홀가분한 기분은 들지 않는다. 남자는 딱히 지금 떠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문득 자신이 만든 유수 장치를 부락민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남자에게 탈출은 그다음에 생각해도 되는 일이 되었다. 


납치로부터 약 7년의 시간이 흐른 후 법원은 남자의 실종을 최종 확정한다. 


'모래의 여자'가 보여주는 결말은 소설의 전반에서 나타나는 일련의 흐름과 대조된다. 필사적으로 탈출을 도모하고, 그 시도가 완전히 좌절된 듯 보이는 상황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남자는 얼마든지 탈출이 가능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 그것을 유보한다. 


그의 회상에서 등장하는 '뫼비우스의 띠'는 세계의 실체를 상징한다. 겉보기에 대칭으로 분절된 듯 보이는 띠는 실상 이어져 있어, 결국 안과 밖 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한 상태이다. 최초, 남자에게 세계는 모래의 벽을 경계로 나누어져 있었다. 하지만 반복되는 시도와 좌절, 사구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선명해지는 바깥세상의 뒤틀림 그리고 유수 구멍의 발견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경험을 통해 그 같은 인식의 경계를 점점 희미해진다.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 사다리를 올라 구멍을 탈출했을 때 남자의 인식은 하나의 세계로 완전히 확장된다. 마지막 장면이 보여주는 남자의 태도는 그 각성의 표징이다. 소설의 전반부와 후반부에 등장하는 현실 인식의 대비는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Got a one way ticket to the blues, woo woo --(이건 슬픈 편도표 블루스야..)

부르고 싶으면 얼마든지 불러. 실제로 편도표를 손에 쥔 사람은 절대로 이런 식으로 노래하지 않는 법이다. 편도표밖에 갖고 있지 않은 이종들의 신발 뒷굽은 자갈만 밟아도 금이 갈 만큼 닳아빠져 있다. 더 이상 걸을 수 없다.(중략)편도표란 어제와 오늘이, 오늘과 내일이 서로 이러지지 않는 맥락 없는 생황을 뜻한다. -p.156-


딱히 서둘러 도망칠 필요는 없다. 지금,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왕복표는 목적지도 돌아갈 곳도, 본인이 마음대로 써넣을 수 있는 공백이다. -p.227-


나뉜 듯 보이나, 본래는 하나인 세계. 하지만 좀처럼 그 실체를 인식할 수 없어 계속해서 다른 세계로 탈출을 시도하는 인간. 평범한 남자가 단절된 모래의 세계에서 겪는 '부조리의 참극'은 이 같은 모순적 한계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소설에 등장하는 모래의 여자는 현실에 안주하는 나약하고 수동적인 인간이 아니다. 그녀야말로 남자가 도달한 각성의 지평에 먼저 도달해 있는 존재와 다름없는 것이다. 


이 작품은 1964년 테시가하라 히로시 감독에 의해 영화화 되었으며, 17회 칸영화제 심사의원 대상을 수상했다. 


* 이미지 클릭 시 영화소개 바로가기


#만족지수 : /5 


  1. 모래 구덩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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