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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재벌 흑역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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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ndharva 2015. 12. 19.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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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기자 개개인의 용기의 문제가 아니다. 재벌이 가둬 놓은 사회 시스템 속에서, 강자의 횡포를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사회적으로 합의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다."


1963년 7월, 4호 태풍 셜리가 한반도를 강타했다. 

이 태풍으로 186명이 목숨을 잃고, 6만 2천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그리고 연이은 호우는 전국의 농토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게다가 전 해인 1962년은 흉년이었다. 이 재해는 전국적인 식량 부족사태를 야기시켰다. 기다렸다는 듯이 설탕과 밀가루의 가격이 폭등했다. 밀가루는 정부고시가의 5배, 설탕은 기존 가격의 10배 이상으로 치솟았다. 식량부족 현상을 감안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가격 상승이었다. 당시 태풍으로 인한 피해액이 약 25억 원이었는데, 밀가루 업계가 취한 수익은 45억 원, 설탕 업계가 취한 수익은 25억 5천만 원에 이르렀다. 그중 설탕 시장의 60%를 차지하고 있던 한 기업은 최대의 수혜자가 되었다. 전 국민이 식량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 설탕 가격 상승을 주도한 이 기업은 그 과정에서 15억 원의 이익을 챙겼다. 게다가 그들은 밀가루 업계에서도 2위의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시멘트의 가격 상승까지 포함하여 소위 '삼분 폭리 사건'으로 불리는 이 일련의 행위에 대해 1964년 6월, 검찰은 "삼분 업체들이 폭리를 취한 점은 인정되나, 이미 증거를 인멸했고, (중략) 이 부분을 조사하려면 사실상 3,000만 국민 모두를 조사하는 셈이므로 처벌이 불가능하다"라는 결과를 발표했으며, 해당 기업들에게 고작 몇 천만 원의 세금을 물리는데 그쳤다. 설탕과 밀가루 모두에서 막대한 수익을 올린 기업은 2년 후인 1966년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다시 언론과 대중의 주목을 받게된다. 이 밀수사건으로 뜻하지 않게 후계구도를 확정하게 된 그들은 그 후 '용인 자연농원 땅투기 의혹', '재산 편법증여', '자동차 산업 진출 실패', '안기부 X파일', '비자금 특검사태' 등의 굵직한 이슈 들을 만들어 내며 한국 사회의 지배 구조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건에서 특유의 치밀한 위기관리 능력을 선보이며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오늘날 재계 서열 1위 '삼성'의 이야기다. 


1952년, 미국의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 하워가 극비리에 한국을 방문했다. 하지만 당시 그가 묵기로 한 시설은 매우 낙후되어 있었다. 당황한 미군에게 한 토건회사의 사장은 "15일 만에 공사를 해낼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공사 허가를 따낸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일꾼들을 용산으로 몰아 피난으로 비어있던 부유층 들의 집을 닥치는 데로 터는 것이었다. 그는 훗날 "나중에 물건값을 받으러 오라는 메모를 붙였다"고 이야기했지만, 사실 그 행위는 불법 가택 침입과 절도였다. 관련된 일화로 부산 광안리 UN 군 묘지 공사 건이 있다. UN 군 묘지에 방문하기를 원했던 아이젠 하워는 그곳에 푸른 잔디를 심어줄 것을 요청했다. 한 겨울에 푸른 잔디가 있을 리 없는데도 앞서 15일 만에 성공적으로(?) 공사를 완료한 건설업자는 3배의 비용을 받고 공사를 맡았다. 그의 생각은 이러했다. "잔디가 아니더라도 풀처럼 퍼런 게 나 있으면 되는 것 아니냐?". 결국 과정은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트럭 수십 대를 동원해 낙동강 일대 보리밭의 보리 포기를 통째로 파내서 묘지에 심었다. 그는 미군들이 "원더풀, 굿 아이디어" 라고 기뻐했다며 훗날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이 또한 타인의 재산을 파괴한 절도 행위가 분명했다. 이 사업가의 이런 무분별한 성향은 훗날 군사정권의 계획경제와 맞물려 거대한 건설회사를 탄생 시켰으며, '무대뽀 정신'이라는 이름으로 '경영의 교과서'라는 찬사를 받았다. 공사기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노동자의 인권 따위는 아랑 곳 하지 않았던 그의 경영철학은 폭력과 식칼을 동원한 노동자 탄압으로 현실화되며, 강성 노동조합의 탄생에 단초를 제공했다. 그는 부동산 특혜 분양을 이용해 권력과 결탁했고, 비자금 조성을 통해 권력이동의 시류에 편승했다. 때론 시장에서 기업을 통제하려는 권력자들에 반발해 스스로 대통령이 되기를 시도하다가 처참한 실패를 경험했고, 김대중 정부의 재벌 개혁을 회피하기 위한 퍼포먼스로 소 떼를 이끌고 고향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 한 때 삼성을 재치고 재계 1위에 군림 하던 그의 제국은 친형제들 간의 골육상쟁을 겪으며 분열되었다. 고 정주영 회장과 현대그룹의 이야기다. 


재벌()의 사전적 의미는 '재계에서 큰 세력을 가진 독점적 자본가나 기업가의 무리, 또는 일가나 친척으로 구성된 대자본가의 집단'[각주:1]이다. 자본주의가 성장함에 따라 나타나는 독점기업의 형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특이한 것이라 볼 수 없다. 하지만 한국의 재벌은 기업구조에 '혈족'에 의한 지배와 상속이라는 강력한 도그마(Dogma)를 결합시킴으로써 기존의 Konzern과 구별되는 Chaebol로 변모했다. 그들은 일제강점기 안에서 탄생한 이래, 군사독재정권의 탄압과 비호를 동시에 받으며 성장했다. 한국은 재벌 중심의 산업화를 추진한 덕분에 고속성장을 이룰 수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그들이 '경제권력'을 독점할 수 있게 함으로써, 산업과 사회 전반에 걸친 불균형적 구조를 잉태시켰다. 또한 일반인이었다면 무거운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중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주어진 단죄는 대중에게 사법부의 공정성과 사회정의를 근본부터 의심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는 현재 진행형이다. 한국에서 마스크와 휠체어는 재벌 총수를 상징하는 일종의 '코스튬'이 되었으며, 대중이 한국 사회에서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의 가장 큰 원인 제공자를 재벌로 칭하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한국 근대의 경제성장에 기여한 바를 모두 인정한다 할지라도, 그들이 사회의 암부(暗部)에서 그려 놓은 커다란 상흔은 그 공(功) 이상으로 파괴적이라는 사실 또한 분명히 직시해야 한다. 


이 책은 재벌의 과(過)를 기록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였다. 조금 다르게 표현하자면 지나칠 정도로 상세하게 기록된 공에 비해 너무나 부족한 그들의 과를 드러내 균형을 맞추고자 하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이 책 한 권으로 무언가 바뀔 리는 없다. 지금까지 유사한 시도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여전히 그들의 과(過)에 주목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강한 것이 곧 옳은 것이라는 논리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으며, 부와 권력만을 숭앙하려는 유혹에서도 탈출할 수 있다. 결국 패배주의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가 관철해야 할 것은 어떠한 공(功)도 지나간 과(過)를 완전히 상쇄 시킬 수 없다는 사실과 믿음이다. 


만족지수 : ★★/5 






  1. 출처 : 다음 백과사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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