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눈을 감아본다. 어쨌든 지금은 좀 자야 하니까.
자고 나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삶을 또 얼마간 받아들일 기운이 나겠지.
김혜진 장편소설. 2017년 9월 출간되었다.
한 여자가 있다. 남편과 사별했고, 일찍이 교사였으며, 여러 직업으로 생계를 꾸리다 현재는 요양 보호사로 일한다. 그녀에게는 독립한 딸이 있다. 삼십 대 중반이고, 무거운 서류 보따리를 싸매들고 전국을 돌며 시간강사 일을 한다. 여름 어느 날 딸은 그녀에게 담보대출을 요구한다. 주인집의 닦달에 별다른 방법이 없다는 딸의 말이 협박처럼 들린다.
딸은 엄마와 함께 살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다, 7년간 동거한 짝과 함께다. 엄마는 딸을 도통 이해할 수 없다. 고정된 직업을 갖지 못하는 사람이 넘쳐나는 시대에 떠도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연일 거리로 나가 동료의 해고가 부당하다며 피켓을 들고, 다치기까지 하는 딸의 모습은 애써 세상과 불화하는 것 같다.
동거인의 존재도 받아들일 수 없다. 제발 떠나 달라고 부탁한다. 그래서 딸이 부디 정상적인 가정을 이루고 살길 호소한다. 늦은 밤, 문틈 사이로 보이는 엉켜있는 둘의 모습에 숨이 막힌다. 그 아이는 딸을 이름 대신 '그린'이라고 부른다. 딸은 레즈비언이다.
엄마인 '나'는 요양원에서'젠'이라 불리는 환자를 담당한다. 그녀는 한국에서 태어나 해외에서 공부하고, 자신과 상관도 없는 이를 돕는데 생의 대부분을 헌신했다. 하지만 요양원에 자리 잡은 후 그녀를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녀가 후원했던 외국인 노동자는 그녀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그 모습이 자신과 딸의 미래처럼 보인다. 1
'젠'의 치매 증세가 심해지자, 요양원은 그녀를 중증 치매 환자 전용 시설로 이원하려 한다. '나'는 저항한다. 치매가 심할수록 익숙한 환경이 더 도움이 된다, 자신과 무관한 일은 다 세상 일이고 치워버리면 된단 말인가, 아무리 제정신 아닌 노인이고. 가족도 없다지만 정말 이건 아니지 않은가.
소설에 등장하는 엄마와 딸은 반목한다. 엄마는 딸을 이해할 수 없고, 말은 항상 다툼이 된다. 그녀에게는 딸을 이해할 자신도, 놓아 버릴 체념도 없다. 하지만 엄마의 말은, 왜 이렇게 소용없는 일에 목을 매냐고, 도대체 언제쯤 정신을 차릴 거냐는 채근에 대한 딸의 항변과 매우 닮았다.
이 소설은 여성에 대한 이야기다. 반목하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며, 이해에 관한 여성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딸에 대하여 이자 엄마에 대하여 이며 그녀에 대하여 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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