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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가스의 탄생 -튀김옷을 입은 일본 근대사 (とんかつの誕生―明治洋食事始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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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ndharva 2016. 8. 20.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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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는 물질보다 정신이 중요시되는 시대다. 

'돈가스'를 탄생시킨 옛 사람들의 숨결을 다시금 겸허하게 되새겨 보았으면 싶다."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한 음식인 '돈가스[각주:1]'는 프랑스의 '코틀레트(영어로 커틀릿)가 그 원형이다. 가축의 뼈 부분에 붙어 있던 고기의 겉면에 미세한 빵가루를 묻혀 팬에 구워내는 요리인 커틀릿[각주:2]은 일본으로 건너온 후 두꺼운 빵가루를 입고 기름에 담가서 튀겨지는 현재의 형태로 변화했다. 하지만 돈가스가 자연스러운 과정을 통해 일본인의 식탁으로 들어온 것은 아니다. 일본은 7세기 후반 이후부터 메이지 유신에 의한 개항 이전까지 약 1200년간 천황령에 의해 육식이 금지된 나라였다. 때문에 메이지 천황의 갑작스러운 금육령 해제와 동시에 일어난 정부의 육식 장려 정책은 당시 일본인들에게 매우 당황스럽고 낯선 것이었다. 우리가 일본의 돈가스를 생각할 때 떠올리는 이미지가 일본인의 식탁에 고스란히 자리잡게 되기까지 약 60여 년이 시간이 필요했다는 점을 봤을 때 그들이 육식을 오롯이 받아들이는 과정에는 주목할 만한 서사가 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돈가스는 단순히 서양의 음식을 일본인의 입맛에 맞게 변형시킨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어찌보면 돈가스는 오랜 시간동안 일본인의 내면에 자리잡은 '금육'의 정서를 그들 고유의 방식으로 해방시킨 음식의 상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책은 돈가스와 함께 일본의 대표적인 양식[각주:3]들을 통해 근대 이후 일본 식문화의 변화를 고찰한다. 그것은 메이지 유신과 함께 태동한 일종의 '요리 유신'과 다름이 없다. 



#스키야키(鋤燒)의 탄생  


일본은 덴무 덴노(天武天皇)[각주:4]이후 약 1200년간 불교 부흥과 실리 추구라는 목적 하에 육식이 금지되어 왔다. 일본에서 생선요리가 발달한 이유는 섬나라라는 지리적 특성도 외에도, 7세기 후반부터 시행된 '금육령' 의 영향이 크다.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이 개항 한 후 메이지 천황은 금육령을 해금한다. 서구 열강과 경쟁하고 그들의 문화를 흡수하기 위해서는 일본인의 신체가 지나치게 왜소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의 장려정책에도 불구하고 서민의 식탁에 육식은 좀처럼 오르지 못 했다. 그 이유는 육식을 먹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1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내재화된 금육에 대한 정서 탓이 컸다. 금육령이 시행되던 시기에 몰래 고기를 먹던 사람들조차 부정함이 깃드는 것이 두려워 남의 집 냄비를 훔치거나 빌려서 조리해 먹었다는 기록에서도 일본인의 육식에 대한 터부는 단순히 율령에 대한 복종 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메이지 초기 그들은 평소에 먹던 된장 전골에 쇠고기를 넣어 먹는 방식으로 육식에 대한 저항감을 완화시켰다. 그리고 점차 두부, 야채, 곤약, 간장 등을 첨가한 '쇠고기 전골'을 즐겨먹게 되었고 이것을 취급하는 가게들이 늘어남에 따라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전골요리의 방식 중에 간토(關東)지역[각주:5]의 조림 방식과 간사이(關西) 지역[각주:6]의 굽는 방식이 있는데 '스키야키'는 간사이 지역의 전골요리를 지칭한다. 이후 간토 대지진이 발생하여 간사이 지방의 스키야키가 간토로 전해지면서 쇠고기 전골은 변형되어 '스키야키'로 불리게 되었다. 현대 일본의 스키야키에서 볼 수 있는 날달걀을 찍어 먹는 방식은 간사이 지역에서 전해진 것이다. 




#단팥빵의 탄생 


일본인이 서양의 빵을 처음 접한 시기는 16세기, 폭풍우 때문에 다네가시마에 표착한 포르투칼의 배 '트럼엘타 호'를 통해서였다[각주:7]. 하지만 서양 빵의 필요성을 인식한 계기는 아편전쟁이 막 끝난 1840년대 초반이다.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영국에 패하여 홍콩을 내어주는 모습을 본 일본은 연안 경비의 필요성을 느끼고 휴대하기 간편한 군사 식량으로서의 빵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페리 제독이 흑선을 이끌고 내항하는 사건이 벌어지며 일본은 개항의 압박에 시달리게 된다. 이에 막부는 존황양이를 주장하며 군사 식량으로써 필요한 빵의 개발과 연구에 착수하게 된다. 이 같은 막부의 군량 정책은 일본의 해군과 육군으로 이어지게 되고, 빵의 개발과 제조에서 얻어진 노하우는 일본의 식품과학과 영양학에 기여하게 된다. 


일반인이 서양식 빵을 접하게 된 시기는 개항 후 요코하마에 들어선 프랑스빵 가게를 통해서였다. 그 후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 막부가 무너지고 유신세력은 영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영국인들을 적극 채용한다. 그 과정에서 프랑스빵보다 속이 부드러운 영국식 빵이 널리 알려지게 되고, 2차 세계대전이 지나면서 일일이 손으로 만드는 방식보다는 기계식으로 찍어내는 미국식 빵이 인기를 끌게 된다. 샌드위치에 사용되는 미국식 흰 빵을 지칭하는 '식빵'이라는 단어도 이때 만들어졌다. 


'단팥빵'은 서양의 빵을 일본 사람에게 맞게 재해석한 음식이다. 이 빵의 개발자는 기무라 야스헤에(木村安兵衛)라는 사람인데, 도쿄 직원훈련소에서 일하던 야스헤에는 네덜란드 저택에서 빵을 굽던 사람을 만난 것을 계기로 빵 제작에 흥미를 갖게 된다. 그는 이스트 냄새가 나는 서양의 빵과는 차별화된 간식형 빵의 개발을 시도했다. 하지만 과정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좋은 질의 누룩은 구하기 힘들었고 설탕의 양을 조절하지 못하면 발효가 제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6년이라는 시간의 분투를 통해 마침내 부드러운 빵 안에 달콤한 팥소가 들어간 '단팥빵'의 개발에 성공한다. 이 획기적인 발명은 일본 빵의 역사를 바꿔놓았다. '단팥빵'은 전국적인 인기를 끌며 황실에까지 납품하기에 이른다. 1872년 야스헤에가 긴자에 세운 가게인 기무라야(木忖屋)는 오늘날까지 단밭빵의 대명사로 성업중이다. 서양의 빵을 일본인의 입맛에 맞게 변형시키고자 한 남성의 집념이 마침내 결실을 이룬 것이다. 



#돈가스의 탄생


'코틀레트'(côtelette: 영어로는 cutlet)에서 코트'(côte)는 송아지나 양, 돼지의 뼈에 붙은 등심과 등심의 형태로 자른 고기를 말한다. 코틀레트는 해당 부위의 고기에 소금과 후추를 뿌리고 계란과 빵가루를 묻혀 프라이팬에 버터로 갈색이 되게끔 구운 것이다. 이것을 일본에서는 처음에 가쓰레쓰라고 불렀다. 메이지 초기 여러 가지 고기를 이용한 가쓰레쓰가 등장했는데 그중 돼지고기를 이용한 가쓰레쓰가 '돈가스'의 전신이 된다. 이 돼지고기 가쓰레쓰는 1895년 긴자의 양식집 '렌가테이(煉瓦亭)'의 기타 겐지로(木田元次郎)가 처음 선보인 후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고기에 대한 해금령 이후 약 23년 만의 일이다.[각주:8] 가쓰레쓰가 커틀릿[각주:9]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그것을 익히는 방식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일본의 튀김 방식은 총 다섯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가쓰레쓰는 그중 템뿌라(天ぶら)방식으로 튀긴 요리이다. 


* 일본의 튀김방법[각주:10]

 스아게 (素揚(げ) 

 그대로 튀긴다

 가라아게 (空揚げ)

 밀가루를 묻혀서 튀긴다

 쇼진아게 (精進揚げ)

 채소류에 튀김옷을 입혀서 튀긴다 

 다쓰다아게 (龍田揚げ)

 간장에 적셔 전분을 묻혀서 튀긴다 

 뎀뿌라 (天ぷら)

 어패류에 튀김옷을 입혀서 튀긴다 


커틀릿 등과 같은 요리가 프라이팬에 버터나 기름을 두르고 적은 양의 기름으로 부쳐내는 팻 프라잉(Shallow fat frying) 방식으로 만들어진다면, 가쓰레쓰는 기름을 넉넉히 넣고 튀김 재료가 기름에 완전히 잠기도록 해서 튀기는 딥 팻 프라잉(deep fat frying)에 해당된다. 


오늘날 돈가스를 먹을 때 당연한 듯 곁들이는 양배추 또한 '렌가테이'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조리시간과 인건비를 절약하기 위해 생 양배추를 얇게 썰어 함께 담는 것은 채소를 익혀 먹는 서양인의 눈에는 낮선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일본인에게 많은 호응을 얻었다. 익히지 않은 양배추를 돈가스와 함께 먹을 경우 입안에 남는 느끼한 맛을 없애주는 산뜻한 느낌이 그들의 입맛에 잘 맞았던 것이다. 


다이쇼 시대(1912~1926)가 끝나고 쇼와시대(1926~1989)에 이르러 마침내 '돈가스'가 등장한다. 쇼와 4년인 1929년 도쿄의 우에노 오카치마치(御徒町)에 있는 폰치켄(ポンチ軒)에서 시마다 신지로(島田信二郎)가 처음 팔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궁내청 대신부에서 서양요리를 한 경험이 있는 그는 가쓰레쓰를 개량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했다. 그 덕에 돈가스에 사용되는 돼지고기의 두께는 2~3.5cm로 두꺼워졌으며, 먹기 좋은 크기로 썰허놓아, 일식처럼 젓가락으로 먹을 수 있게 변화하였다. 


일본인의 식탁에서 돈가스가 밥과 함께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된 데에는 '우스터 소스'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시대 중엽까지 가쓰레쓰에 어울리는 소스가 전혀 없었다. 프랑스 요리의 소스는 일본인의 입맛에 잘 맞지 않았고, 소금이나 후추 등을 뿌려 먹는 것은 별로 맛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1898년 전국간장대회에서 영국의 우스터 소스가 선을 보이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 우스터 소스는 처음에는 '서양간장'으로 불렸는데 이 소스 덕분에 돈가스가 밥과 잘 어울리는 요리가 될 수 있었으며 소량의 반찬으로도 많은 양의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

두꺼운 고기에 밀가루와 계란, 빵가루를 입혀 튀긴 음식인 とんかつ의 음독은 '톤카츠'에 가깝다[각주:11]. 톤카츠에서 '카츠'는 한자 勝(이길 승)의 음독인 '카츠'와 발음이 같다. 때문에 '톤카츠'는 일본 가정에서 다음날 시험을 치르거나 중요할 일이 있는 자녀를 위해 어머니가 '싸움에서 승리하라는 의미'로 해주는 음식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일본인들에게 '톤카츠'는 어린 시절부터 익숙하게 먹어온 음식이자 어머니의 음식인 것이다. 이 '톤카츠'가 한국으로 건너와 '돈까스'라는 이름이 되었다. 일본의 경우와는 다소 다르지만 한국의 특정 세대에게도 '돈까스'는 맛 이전에 '추억'의 음식이다. 그리고 그 추억은 더 보편화, 세분화되어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튀김옷을 입은 일본근대사'라는 부제에서 나타나는 이 책의 학술적 의미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돈까스'라는 음식에 애정을 갖고 있다는 점 만으로 일독의 가치가 있다. 


#만족지수 : 


  1. 히라가나 : とんかつ 가타카나 : トンカツ 일어 음독으로는 '톤카츠'에 가깝다 [본문으로]
  2. 독일의 슈니첼이 프랑스로 전해져 커틀릿(프랑스어로 코틀레트)이 된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3. 여기서는 일본화된 서양음식 [본문으로]
  4. 재위 : 673년 3월 20일 ~ 686년 10월 [본문으로]
  5. 관동지역 [본문으로]
  6. 관서 지역 [본문으로]
  7. 밀가루를 발효시켜 쪄서 먹는 찐빵은 가마쿠라 막부 시대에 일본에 전해졌다. [본문으로]
  8. 이때까지 돈가스가 아닌 가쓰레쓰로 불렸다. [본문으로]
  9. 혹은 그와 유사한 서양요리 예) 독일의 '슈니첼' [본문으로]
  10. 오카다 데쓰(岡田哲)의 (밀가루 食문화사) 中 [본문으로]
  11. 책 제목에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돈가스라는 발음을 그대로 쓴 듯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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